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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을 빛낸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과 숨결이 느껴지는 통영

대여 김춘수(金春洙), 전집을 내면서

김춘수

해방되던 그해 가을부터 나는 경향 각지의 신문 잡지에 시를 발표했다. 나는 신춘문예나 잡지의 추천을 통하여 문단에 나오지 않았다.

40년대 후반 4~5년 동안은 나로서는 아류의 시절이다. 선배시인들의 시를 모범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 되리라.

50년대에 들어서자 나는 내 시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 끝에 나타나게 된 것이 꽃을 소재로 한 일련의 연작시다. 그때 나는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한편 릴케의 시를 다시 읽게 되었다. 왜 다시란 말을 쓰느냐 하면 학생 때 나는 릴케를 탐독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이 나대로의 허울로 내 시에 나타나게 되었다. 아주 관념적인 시다. 나는 스스로 이 무렵의 내 시를 플라토닉 포에트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자 이런 경향에 대하여 또 한 번의 반성과 비판이 일게 되었다.

60년대 중반쯤 해서 나는 새로운 트레이닝을 의도적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시는 관념(철학)이 아니고 관념 이전의 세계, 관념으로 굳어지기 이전의 세계, 즉 결론(의미)이 없는 아주 소프트한 세계가 아닐까 하는 자각이 생기게 되었다. 이 자각을 토대로 시를 추구해간 결과, 나는 마침내 무의미시라는 하나의 시적 입지를 얻게 되었다. 무의미시의 일차적인 과제는 시에서 의미, 즉 관념을 배제하는 일이다. 이 과제를 실천에 옮길 때 얻게 된 것이 서술적 이미지라고 내가 부른 그것이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쓴다는 것은 이미지를 즉물적으로 쓴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지는 의미(관념)의 그림자를 늘 거느리고 있다. 이 그림자를 지우기 위하여 나는 탈이미지로 한걸음 더 나가게 되었다. 탈이미지는 결국 리듬만으로 시를 만든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낱말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의미의 그리자가 늘 따라다니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낱말을 해체하여 음절 단위의 시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언어도단의 단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선적 세계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 시는 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무의미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무의미시 이전의 의미의 세계로 후퇴할 수는 없다.

나는 일찍(40년대 말) 소설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몇 편의 아주 짧은 습작을 내놓게 되었다. 중학생의 작문 같은 것이다. 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나는 그런대로 어디로 내놓을 수 있는 소설(장편)을 한 편 쓰게 되었다. 그것이 『꽃과 여우』라는 제목의 자전소설이다. 일정한 줄거리가 없고 수많은 영화평이나 러시아 19세기의 소설평 같은 것들도 양념처럼 끼여 있다. 나는 물론 소설 분야에서는 아마추어를 자인한다.

나는 또 수많은 에세이를 썼다. 나의 철학적인 사고와 시사문제를 다룬 것 등 다양하다. 나는 원래 기질적으로 사변적인 데가 있다. 그래서 이런 따위의 글들이 자연스럽게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나온 듯하다.

나의 천착벽은 시론에 대하여도 예외 없이 드러났다. 이러하여 나는 또 많은 양의 시론을 남기게 되었다. 개중에는 교재용으로 써여진 것도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다. 나는 60년대에 종합 잡지 <사상계>에 상당 기간(일 년 이상) 시의 월평을 맡아 쓴 일도 있다. 월평이란 현장비평(실천비평)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품(시는 작품이다)을 구체적으로 해부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