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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을 빛낸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과 숨결이 느껴지는 통영

박경리(朴景利), 본명:박금이(朴今伊)

박경리

부모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든가 기억에 남아 있는 고향이 없는 뜨내기, 그런 경우 출발에서부터 그들의 인생은 불평등으로 시작된다. 그 불평등은 역사가 빚은 죄악으로, 혹은 오늘 상황이 자아낸 한탄스러운 것으로 볼 수 없다. 물론 6ㆍ25와 같은 격동에서 파생된 것은 역사와 인간에게 다 책임이 있는 일이지만, 고아나 실향(失鄕)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도 삶 자체에서 대다수는 아닐지라도 늘 있어 왔다.

화요월태(花容月態)의 미인과 불구자가 다같이 태어낫듯 인위(人爲)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불평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미인이 추물로 썩어가고 노틀담의 꼽추가 아침이슬같이 맑게 떠오르는 것은, 그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요, 존재했기 때문이다. 운명적으로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변모하게 하는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고아나 뜨내기는 다른다. 그것은 돌아올 수 없고 한 줌이 머리칼도 남음이 없는 상실이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흰 새, 등줄기에 까만 줄이 있는 그 새는 내가 창문만 열면 연못가에서 날아가버린다. 그 조그마한 새가 붕어를 잡아 먹으로 왔을 리 없고 붕어가 사는 연못에 장구벌레 따위는 없다. 강에서 건져다 넣어준 우렁이를 먹으로 왔을가. 새는 매일 온다. 연못 둘레를 빙빙 돌면서 물 속에 기웃기웃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보다 더 애처로운 것은 아침이면 죽어서 연못에 떠 있는 붕어다.

아는 분이 강에서 낚아 넣어준 것인데 나중 애기를 듣자니 오염이 심한 강에서 낚은 고기라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고기가 맑은 묵에 와서 죽다니. 춘원(春園)의 소설《원효대사》에 죽은 너구리를 장사지내며 대안대사(大安大師)는 “태어나지 말아라, 내어지 말아라-”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런 구절이 있었던 것 같다. 살아서 연못을 기웃거리는 작은 새나 죽어서 떠 있는 붕어를 보면서 나는 곧잘 “태어나지 말아라, 태어나지 말아라”하고 중얼거리곤 한다.

생명 자체가 한(恨)이다. 한, 한이라는 말을 하고보니 평소 마음에 걸렸던 일이 생각난다. 이것 저것 다 마땅치 않아 병들었나 실을 만큼 근자의 내 심정이 편하질 못한데 마음 속에서 꽤 자주 자맥질하는 마탕찮은 생각, 그 것은 일반적으로 한을 감상이나 뭐 그런 따위로 보는 경향과 청승맞은 민족정서의 하나로 부정적 측면에서 평가하는 분들의 견해 그것이다. 어휘와 실재 사이에는 상당히 복작하고 다양한 거리가 있는 것 같고, 가령 한 민족의 의식구조를 분석하는데 폐쇄적이다, 진취적이다 하는 일도양단식(一刀兩斷式)의 논리 전개는 자칫 본질에서 유리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단되는 두 유형에도 부정적, 긍정적 두 요소가 공존하는 만큼 어휘 하나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 어렵다. 게다가 언어 자체가 근사체(近似體)일지는 몰라도 본질에 도달하기엔 영원히 완전치 못한 것이다. 피상적인 것에서 생명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시간, 출발하고 방황하고 갈등하던 인간의 마음 자취를 한으로 집약했다 하여 그것이 모두 집약된 것도, 한국 사람만의 것으로도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양복, 한복 외양이 다르나 모두 옷임에 틀림없고 양옥, 한옥 그 외양이 다르나 집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또 결핍이 충만되고 끝없이 상실해가야 하는 생명의 자리에서 비애라 하여 반드시 체념만 하는 것도 아니요, 환희라 하여 반드시 미래지향만도 아니다. 한때 자조(自嘲)를 동반한 엽전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한(恨)을 두고 애기하는 이른바 학구파들 의식 밑바닥에 엽전이라는 자기모멸과 서구 지향의 사대의식은 없었는지, 유식한 칼끝으로 논에서 김매는 농부의 내면[恨]을 쪼개려 드는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잉여 행위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넓게 보아도 그렇고 깊이 보아도 그렇고 결국 주제는 생명에 관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려던 얘기가 엇길로 나갔기 때문에 고향을 말하여던 지면이 많이 잘려나간 것 같다.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다. 더러는 어떤 사연으로 하여 고향을 증오하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변한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요즘 흔하게 쓰이는 말에 뿌리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탄생과 존재로서 그간의 추억 때문에 고향은 뿌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산가족 찾기에서 나도 남못잖게 운 사람인데 아주 어렸을 때 헤어져 공통의 추억을 못 가진 사람의 경우 나는 묘하게 그들 후일담에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그들은 핏줄이라는 필연에 매달려 공통의 추억이 없는 백지에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상상으로? 관례적으로 남이 지낸 세월의 흉내? 어쨌거나 가상(假像)으로 밖에는 메워지지 않을 그들 세월, 혈육이라는 강한 부름 때문에 굳게 맺어질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이질적인 것으로 갈등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고향이란 인간사(人間事)와 풍물과 산천, 삶의 모든 것의 추억이 묻혀 있는 곳이다. 보호를 받고 의지하던 20세 안쪽의 시기, 삶을 위한 투쟁 이전의 서로가 순결하였던 기간의 추억은 보석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모든 자산이며 30년 간 내 문학의 지주(支柱)요 원천(源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30여 년, 원주(原州)서 5년 간 뜨내기 생활을 하며 나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

수차의 해외에서의 초정을 사양하고 비행기라고 제주도행(濟州道行)조차 타 본 일이 없는 처지고 보면 문학과 대면의 쓰라린 세월도 세월이려니와 변화를 싫어하는 내 성격에 연유한 것이나 아닐는지. 그러나 귀향 않는 이유는 여행이 갖는 번거로움이나 시간에 인색한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분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고향에 가면 나는 더욱어 이방인이 될 것이다.”

급격하게 변한 세태를 고향땅에 가서 보고 싶지 않다는 뜻도 있고 20세까지 고향도 나도 수정같이 융회되었으나 40년 가까이 산천도 인심도 변했으려니와 나도 40년의 먼지를 쓴 사람이다. 40년 세월에서 면도날같이 사람을 보게 된 내 불행한 눈에 사물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 또 40년이 지나 찾아간 내가 그곳 분들에게 어떻게 비칠것인가. 세월의 도랑을 생각하면 그 생소함을 나는 도저히 견디질 못할 것만 같다.

고향에까지 가서 의식의 의상을 걸친다는 것은 끔찍스럽다. 그립고 사랑했던 곳이기 때문에. 생활과 작업에 얽매여 움직일 수 없는 형편도 형편이지만 《토지》를 끝낼때가지만이라도 보석에 하자가 생겨서는 안 되겠다고……

뻐꾸기 울음을 들으며 하잘 것 없는 언어를 절감한다. 생각을 말이 파괴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1984.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