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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을 빛낸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과 숨결이 느껴지는 통영

윤이상(尹伊桑)

윤이상 노년 사진

윤이상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윤기현(尹基鉉)과 김순달(金順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통영은 풍부한 전통문화뿐만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한 유럽의 신문화가 활발하게 교차하며 공존하던 곳으로 청마 유치환 등 많은 민족적 시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한 문화적 요지이자,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였다. 윤이상은 감수성이 풍부한 유소년시절 통영의 역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다채로운 전통문화(유교적인 제사의식, 선비들의 풍류, 유랑극단의 공연, 부유한 친척의 잔치 때마다 들었던 기생들의 노래와 전통악기 연주, 통영 오광대놀이, 무당의 굿, 석가탄신일 미륵산의 연등제, 승려들의 예불소리와 범종소리, 정월 대보름의 다리밟기와 연날리기, 5월 단오제, 어부들의 남도창 등)와 새로이 유입되는 신문화를 온몸으로 호흡하며 성장한다.

다섯 살 때부터 3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윤이상은 여덟 살에 유럽식 교육체계의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신문화를 체험하기 시작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명확한 음계의 유럽 노래는 무엇보다도 어린 윤이상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풍금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唱歌)의 수재였고, 독보력 또한 특출했다고 한다. 집 근처의 교회에서 불려지던 찬송가도 윤이상이 어린시절 경험한 서양음악의 하나였다. 그는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고, 연주하며 직접 선율도 써본다. 이때 그가 만든 선율이 통영의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영화관의 막간에 행해지는 음악 연주회에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편곡 연주되고 있었고, 우연히 자신의 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듣게 된 윤이상은 작곡가가 되기를 꿈꾼다.

윤이상 연주 사진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하여 2년간 수료한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일곱 살에 서울로 올라간다. 그는 2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군악대 출신의 한 바이올리니스트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한다. 또한 국립도서관에 소장 된 총보를 이용하여 독학으로 고전음악과 R. 슈트라우스, 힌데미트 등의 음악도 공부한다.

1935년 다시 통영으로 내려온 윤이상은 상업학교에 진학할 경우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학원에 다니며 작곡과 음악이론 및 첼로를 공부한다. 오사카에서 공부하는 동안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는 여기서 억압 받는 동포들의 삶을 보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한국으로 귀국한 윤이상은 1937년 민족의 식이 강한 통영 산양면의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 시기에 그는 오페라의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을 출판한다. 1939년 그는 다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프랑스의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유학한 이케노우치 도모치로에게서 대위법과 작곡을 공부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될 기운이 보이자 고향으로 돌아온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징용되어 미곡창고에서 일하게 된다. 반면에 그는 지하그룹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도모하다 1944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 하고 두 달간의 감옥생활을 한다. 석방 후 그는 다시 저항활동을 도모했고, 이를 알게 된 일본경찰을 피해 서울로 도피한다.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던 그는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 통영의 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 해방 후 통영여고 시절까지 유치환, 김상옥 등과 함께 통영여고, 통영고교, 욕지중교 외에 다수의 초등학교 교가를 작곡함.

윤이상 중년 사진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윤이상은 통영의 문화 예술인들(시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작곡가 정윤주 등)과 함께 민족문화 창출을 목적으로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음악부문을 주도해 나간다. 이 기간 동안 윤이상은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한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어 이들을 교육하고 보살핀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산사범학교로 옮긴다. 그는 음악을 가르치고 가곡과 현악4중주 등을 작곡하면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하며, 1949년에는 다섯 개의 가곡을 한데 묶은 초기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한다. 윤이상은 같은 학교 국어교사인 이수자(李水子 1927-)와 1950년 1월 30일 결혼한다.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그 해 11월 첫 딸 정이 출생한다. 1950년에 부산에서 조직된 ‘전시작곡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951년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를 지내다가 1953년 휴전협정 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한다.

1956년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3년간의 서울생활시기에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을 출강하며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하며 한국 음악계에 작곡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한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가 ‘한국작곡가협회’로 서울에서 새로이 발족했고, 윤이상은 이 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음악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1954년에 발표한 윤이상의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는 당시 한국 음악계의 당면 문제와 ‘한국음악의 수립’이라는 명제를 위해 악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글로서, 윤이상의 작곡 작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 1956년 4월 윤이상은「현악4중주 1번」「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당시 한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유학을 결심한다. 그는 1956년 6월 불혹을 앞둔 39세의 나이에 동료 및 선, 후배 음악가들의 따뜻한 격려 속에서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이 길이 그가 다시는 고향을 볼 수 없는 길임을 그 누구도 예감하지 못했다.